마지막으로 헤스터의 남편이자 의사이며, 작가가 비난하고자 하는 것을 대변해주는 칠링워드를 보자.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남편이고 유능한 의사라는 설정인데, 헤스터가 목사인 딤즈데일과 불륜을 하게 되고 그 증거이자 악의 씨라고 생각되는 펄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악의에 찬 복수를 하게 된다. 복수인 즉, 칠링워드가 딤즈데일 목사의 건강을 체크해주는 일종의 주치의였는데,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이었음을 숨기고 딤즈데일의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목사로써, 존경받는 위치로써, 인간으로써 치욕적인 죄를 짊어지고 있는 딤즈데일을 오래 살게 함으로써(그것도 원수인 칠링워드 자신의 의술로써) 살아가는 동안 그 죄를 평생 안고 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7년간 계속 됐으며 실제로 딤즈데일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자책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비극성을 극대화 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타락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유능한 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청교도적인 이상주의 세상을 자의든 타의든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 모든 것이 결국 그 이상주의 세상을 뒤흔드는 카오스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선 딤즈데일에게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딤즈데일에게 죄 감각을 고취시키는 의료행위와 친한 교우 관계 행동자체가 칠링위드가 저지르는 죄인 것이다. 목사로서 딤즈데일이 자신이 헤스터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의 입막음의 행위이며, 죄에 복수함에 또다른 죄가 나타난다는 사실, 즉 완전한 이상적인 사회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 반영되는 것이다.

위의 주제를 더 잘 보여주는 소설에서의 배경이나 소품에 대한 생각을 말해보겠다. 제목이기도 한 ‘주홍글씨’ 라는 것에 관해 먼저 말해보겠다. 주홍글씨란 죄지은 자에게 일종의 낙인 역할을 하는 죄의 표식이다. 그것도 평생 안고가야하고 청교도적 법도의 엄격함과 절대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표식 자체의 성질은 소설전체를 통틀어 두번 변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숲에서 헤스터가 딤스데일을 만나서 칠링위드의 정체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헤스터가 딤스데일과 도피를 도모하면서 주홍글씨를 시냇물에 떼내어 버리는 장면이있다. 이때의 주홍글씨의 상징성은 죄에 있어 두사람의 해방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는 에필로그에서 변하는데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원래 의미로의 회기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딤스데일과 칠링위드 사후 그녀의 딸 펄과 유럽으로 떠나는 헤스터가 나이가 들어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와서 떼었던 주홍글씨를 달고 소설의 무대인 뉴일글랜드에서 평생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마지막에서 죄를 떠나 인간은 살 수 없다 라는 작가의 의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펄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말하자면, 결과적으론 소설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키로써 작용한다. 딤스데일에게 하는 펄의 키스는 그 목사의 죄를 승화시키는 한편, 인간성의 정화를 보여준다, 비록 펄 자신은 불륜의 자식이라는 면이 있지만 결국은 그런 불륜의 자식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나중에 성공한다는 후일담으로 보아 이 소설에 있어 유일하게 행복하게 된다. 앞서 필자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전개 수수법이 상징이라고 말했는데 필자가 펄을 통해 가장 신선했던 점이 있다면 아이의 눈을 통한 독자 상상의 여력을 작가가 남겼다는 점이 었다. 펄 자신은 이 소설에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고 나이가 어려서 작가 생각의 개입이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적었다. 그러니까 헤스터 등의 모든 행동이나 생각은 상징화된 언어도 표현되는데 펄은 아이의 순진함에 입각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펄의 눈을 통한 등장인물의 제구성은 소설을 읽어가는 하나의 재미였다.

이 소설에서 또 중요한 장치는 바로 법을 집행하는 ‘형장’ 이다. 이 소설의 시작부분의 배경이기도한 형장은 소설 전체에 있어 처음, 중간, 끝에 배치되어 있는데 처음 헤스터의 불륜에 관한 재판 장면, 두 번째는 딤즈데일이 용기내서 고백하려고 시도하는 시점, 그리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는 딤즈데일이 죽는 장면이다. 이런 요소에 있는 형장 각각의 의미도 틀리다. 재판에 있어 형장은 헤스터의 죄만 존재하고 뉴잉글랜드 법의 신성함을 뜻한다. 중간의 고백장면은 딤즈데일의 고뇌를 뜻하는 장소로서 대변 된다. 딤즈데일이 죽는 장면에서 형장은 처음 헤스터 재판이 열릴 때 딤스데일이 솔직히 고백하지 못한 죄의 해소를 말하고 처음의 뉴잉글랜드의 이상적인 청교도 법도를 대표적인 청교도 집행 기관인 형장에서 거부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위에 필자가 서술한 것을 통틀어 간단히 주제를 생각해 보자. 자신의 죄를 말하고 싶어도 자신의 안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위치와 신적으로 자신을 존경하는 신자들을 실망하지 않게 하기위해, 나아가 목사 신분으로 자신이 평생 따르던 신념인 청교도적 금욕적인 삶의 타락을 자신이 인정해야 할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딤즈데일의 마음을 통해. 이런 고통의 소통과정을 풀어줄 단 한가지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죄를 인정하라’ 라는 것. 그리고 그 죄를 인정하고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이고 다시 말해 죄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적인 낙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필자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고전은 고전에서 머무를 수 없다 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진 1800년대에 있어 이상적인 관념을 철폐하고 자하는 무거운 주제는 분명 요즘 시대와는 동떨어진 주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과거의 문학은 현재의 마음의 양식을 충족해 줄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며, 가장 중요한 ‘현재에 다시 그 현상을 조명해볼 수 있다’ 라는 점에서 고전이 좋다. 예를 들어 이상주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분명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주의 반대론자가 본다면 공감하며 읽지 않을까? 물론 이상주의가 틀리다 맞다의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고의 모임은 현재시대 상황을 한번쯤 반성해 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너무 이상적인 사회이지 않는가? 또는 너무 법이라는 틀에 박혀 사는 것 아닐까? 이런 반성의 반복은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각각 죄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딤즈테일과 헤스터, 그리고 칠링위드 같은 지금 사람의 삶을 재조명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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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의 고전중인 하나인 주홍글씨는 스토리에 치중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 개개인의 심리묘사에 치중한 상당히 감성적인 소설이다. 누가 고전은 고전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했던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에도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기에 ‘고전’ 이라는 틀을 벗어나 필자에게 준 감흥은 대단했다. 또한 스토리의 진전보다는 작가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무거운 주제를 풀어쓰는 작가의 힘은 필자에게 다소 지루해보일지모르는 소설 전개에 큰 힘이 되었다. 처음 주홍글씨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시절에 보았던 TV영화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몰랐지만 소설로 접하고 나서는 주홍글씨가 뜻하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 전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놀라웠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홍글씨가 단지 낙인을 찍는다라는 의미로써 페시미즘(pessimism:염세주의) 소설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소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죄를 지음에 있어 행복에 입각할 수 있다는 금욕을 거부하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이것은 등장인물의 속성과 작가의 시점에서 들어난다.

우선 시점부터 보자. 작가의 시점은 내면세계를 보임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서술해 주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독자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 서술자가 모든 것을 다 밝혀 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상하거나 유추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독자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전개라기보다는 작가의 주장을 주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소설을 본다기 보다는 소설을 빙자한 논설문을 보는 듯했다. 사실 필요이상의 미사어구의 사용으로 소설에 집중하기 어려웠을뿐더러 느린 템포의 전개와 주변 상황을 이용한 상징수법으로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던 소설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심리설명에 치중함으로써 작가는 등장인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서술 방식이 이 소설의 최대 무기이고, 인간내면에 있어 작가의 놀라운 서술기법은 글을 읽어 나감에 따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이런 시점을 통해 등장인물 개개인은 무엇을 대변해 주는가?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을 보자. 헤스터는 간통을 하고 그 죄로써 주홍글씨를 새기고 다녀야하는 인물이다. 평생 달고 다녀야하고 간통한 남자를 숨겨야하는 가련한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주제가 숨겨 있다. 헤스터는 A(adultery)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다. 즉, 죄를 지었다는 증표이다. 그리고 헤스터의 A는 도덕성을 대변하기 위한 장치이다. 청교도 사회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자들과 반대되는 헤스터는 이상의 완전함을 깨뜨리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세상이 존재할 수 없고 죄를 짓고 참회할 수 있음에도 진정한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헤스터 프린을 통해 19세기에 있어 파격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간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 오히려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하다고 할까? 완벽한 이상사회를 거부하는 작가의 대변자로써 그녀는 어쩌면 반사회적인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위 사람들이 주홍글씨를 가진 그녀를 멸시하면서도 그녀의 이웃을 향한 착한 성품과 마음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이상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다. 겉으로는 죄지은 그녀를 멸시함에 이상적인 사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갗추고 나아간다고 볼 수 있으나 정작 헤스터의 성품을 인정하는 부분은 청교도 사회에 있어 위법행위이고, 완전한 엄격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외침인 것이다.


그녀의 간통 상대이자 목사인 짐즈데일은 사회의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목사로써의 위치에 거짓을 일삼을 수 밖에 없는 그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소설에 따르면 그 당시의 목사의 지위는 완고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신앙심과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위법을 저지른 다는 것은 이상사회에 대하작가의 회의를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세계 건설에 앞장서야 할 지도층이 간통이라는 -그것도 목사라는 직책에서 - 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비판 수단이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 완벽함을 연기하는 것, 그리고 완벽함을 원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존경받는 리더가 완벽하지 못함은 분명 아이러니한 상황이자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라는 것으로 한번 더 신랄하게 비난한다. 짐즈데일이 설교를 하는 도중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듣는 청중들은 짐즈데일의 죄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존경받는 목사 자신도 죄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들은 얼마다 더 죄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죄를 인정함에 있어 겸손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어 더욱 더 존경받게 되는 상황이 된다. 짐즈데일을 통한 사회 위선의 비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짐즈데일이 죄를 말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고 혼자서 고뇌하는 것이 진정한 이상사회를 유지하는 행위일까? 이것에 작가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죄를 말하고 죄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적인 행위이고, 비록 죄를 인정하는 것이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비인간성에서의 회복을 가져다주고,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딤즈데일이 새벽 중에 세상의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광장의 형장에 올라가 용기를 내어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자신의 죄를 참회할려는 모습에서 더욱 부각된다. 나아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면, 즉 죽음의 앞에서 자신을 죄를 말하고 헤스터와의 딸이자 자기의 딸이기도 한 ‘펄’ 의 키스를 받는 장면에서 인간성의 회복은 죄의 숨김이 아니라 죄를 들어 내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 2편에서 계속. http://dirlove.tistory.com/entry/주홍글씨를-읽고서-쓰는-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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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신이 따로 없더군요. 의외로 우리나라 언론들이 일본어 판으로 번역해서 포탈등에 기사를 송고하는 것 같은데 한 일본 네티즌이 이 기사를 퍼오면서 시작된 스레드입니다. 이 사람이 세운 쓰레드에 150개 정도의 댓글이 달리면서 열심히 우리나라를 욕하고 있는데 비록 욕 이지만 그중에서도 눈여겨 봐야 할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2ch에들의 말이 험하긴 하지만 의외로 개념인도 있기에 실어봅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을 밝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아들은 어떻게 사냐! 라는 말을 했다는 기사에 대한 일본 네티즌들의 댓글입니다. 전부 다 쓰진 못하고 몇몇개만 축약해서 올립니다.
욕부분이 많아 이미지처리하되 번역기상이상한 부분은 직접 원문을 보면서 해석했습니다. 
[앞으로도 살인으로 일가족을 부양하는 조선인이 나올것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문의 선인은 조선인의 선인입니다.) 저작의 의미는 살인 하고도 책을 써서 돈을 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돈을 위해 책을 출판할려는 마이너 출판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책 사는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민사를 일으킨다는것은 민사소송을 일컸고 이 분이 쓰신 거에 의하면 일본에는 인세를 희생자에게 주는 제도가 있나봅니다.]
[개념인 한분이십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아들은 소중하면서 남의 딸들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의외 였습니다. 김일병 사건을 이야기 하는것 같은데 우리나라 사형제도가 있는지에 대한 한 네티즌의 답변이었습니다.]
  
[글쎄요. 제 기억에는 좋은 가정이 있는데도 살인범 같은 사이코패스는 일본이 더 많았던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 격하시켜 까기 사작합니다. 기생충이라고 욕하는 군요]
      
[이번 스레드에서 제가 꼽은 가장 심한 말 best 1위였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범죄자라고 하는 무식한 애들]
  
[가장 안타까웠던 글이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82년도에 우범곤이라는 사람이 약 57명을 총을 살인했다는 일로 실제로 주소에 있는 위키피디아로 가니 세계 최단시간 대량 살상범으로 기제 되어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실제로 사형 반대를 위치는 인권단체와 교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권단체는 없어져야 할듯]
[한국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일본 네티즌. 좀 짱인듯.] 
[우리나라와 일본의 국민성에 대한 댓글인데...전 조금은 동의하는 편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재일은 거져라 열등한 조선인 등등의 변역해도 화만나는 글들이었습니다.
출처(http://gimpo.2ch.net/test/read.cgi/news4plus/1233627573/)
하지만 일본 네티즌들이 이런 사건을 이용해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는데 전념하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을 수 있었고 우리나라 네티즌도 마찬가지지만 막무가네로 욕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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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부터 딱 10일 후 발렌타인데이가 있습니다. 솔로에겐 아무날도 아닌 듯이 지내거나, 말 그대로 발렌타인 12년산 술을 여친없는 친구와 마시는 그런 날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반대로 연인에겐 하나의 축복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인있는 많은 분들은 벌써 발렌타인 준비로 바쁘실텐데요. 좀 돈이 있으신 분들은 레스토랑을 예약하셨겠고, 남친과 멋진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고급 호텔이나 모텔 예약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시말해 돈이 많이 깨지는 시기인데요. 꼭 이럴 때를 노려 원가보다 더 많은 돈을 받거나 하는 업체가 등장하거나 반짝 팔리는 선물을 출시해서 판매하는 업체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느껴지는 이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에 대해 알아볼까요? 다음 사진은 네이버의 백과사전에서 찾은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구절이 있군요. 새들이 발정하는 때라.. 우리나라 사정과 다르진 않는듯] 
딱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콜렛과 전혀~상관없는 데이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됬든간에 지금은 초콜렛을 여자'만' 남자에게 주는 날로 변질되었습니다. 사실 이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렛교환은 서양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다만 제가 미국에서 경험해본바에 의하면 여자가 남자에게만 주는 날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가족도 즐기고 연인도 즐기는 날이라고 교수한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근데 왜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하거나 초콜렛을 주는 날이 되었을까요? 많은 분들이 아시고 있겠지만 이것은 초콜렛, 제과 업계가 만든 관행이라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이걸 산다면 5만원 이상 깨질듯]      
정확히 말하면 일본에서 넘어온 것으로, 일본에서 매출 증대를 위해 초콜렛을 주는 날로 만들었다는 것이 현재 정설입니다. 
여기서 약간 비판을 해보면 일본 싫어하는 국민성이 왜 이런 날까지 따라하는 것 일까요? 
뭐 사실 고가의 초콜렛이 아니라면 선물로 주는 것 자체에 별 다른 이견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초콜렛만 주는 날이 아니라 초콜렛 + 선물까지 "당연히" 줘야하는 데이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커플 속옷등의 아이디어 상품을 넘어 지갑 등의 고가의 상품을 주는 일도 발생하지요. 아예 업체들이 광고나 기사를 통해 이런일을 부추기기까지 합니다.(오늘 야후 메인 근처에 커플 속옷 발렌타인 용으로 판다는 '기사'가 뜨더군요) 또 한가지 말하자면 화이트데이는 미국에는 없는 날로 이것도 일본과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 여자친구에게 화이트데이에 그냥 사구려 초콜렛을 선물줬다가 "난 Guylian 초콜렛 아니면 안먹어!"라고 팽당한 아픈 기억이 있네요. 암튼 당연히 발렌타인데이에 받았으니 화이트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친에게 뭐라도 사서 토해내야 하지않겠어? 라는 컨셉으로 업계가 만든 날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화이트데이의 유래는 발렌타인 데이 때 남은 제고 초콜렛을 팔아보자는 날로써, 상술에 극에 달한 날이기도해 매번 이맘때 쯤 벌레 들은 초콜렛이 들어있네, 유통기한 지났네 등등의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물론 먹는 것에 국한된 것은 안닙니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하여 모텔도 더 많은 돈을 웃돈으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발렌타인데
                                   [한 관련 사이트에서 발췌한 이벤트, 이 이벤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님]   
이가 꼭 필요한 것일까요? 선물을 주고 받아야 서로에게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의무감과 남의 시선 때문에 즐거워야할 날들이 오히려 고민만 쌓여가고 고통만 있는 날이 되지 않았나요? 왜 우리가 업체들의 상술에 놀아나야 합니까!   
 이만 글을 줄이면서 옛날 이야기 하나 해봅니다. 초등학교 때 발렌타인 데이만 되면 항상 불안에 떨었습니다. 등교시간 때 책상 서랍에 초콜렛을 넣거나 편지를 받는 등의 그런 일들 말입니다.  이번에 발렌타이 데이때 내 책상 서랍에 나만 초콜렛이 없으면 얼마나 쪽팔릴까라는 생각을 하고 등교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어떨까요? 이런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하여 소외받게 되는 부류는 없을까요? 전 분명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왕따는 분명 못받을 테고, 적게 받는 애들 또는 못받는 애들이 받는 소외감은 클것입니다. 전 차라리 비싼 초콜렛보다 자선을 하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여친에게 요번에 나 줄 초콜렛 돈있으면 불우이웃 도우는게 어때라고 말할 수 있는 훈훈한 발렌타인데이가 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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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와 허경영 이야기를 하면 너무 늦은 감도 있지만, 요즘같은 불신의 시대에 많은 국민에게 이슈화 됬던 인물이 아닐까합니다. 갑자기 허경영이 생각난 이유는 청사진에 있어(그것이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자신의 지론을 표출하고 대중의 관심을 끈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기엔 허경영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우선 이 둘의 공통점을 알아보면 학력에 있어 전문대졸, 방송통신대졸로써 학력문제를 야기했고 둘다 지금은 구속상태에, 민감한 이슈인 경제에대해 논했다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공통점 중에서 가장 중요시해야할 것이 "미혹" 시키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람을 주목시켰고 검찰의 발표대로 라면 "사기"를 쳤다는 것이 겠지요. 제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두분의 말이 사실이고를 떠나 사람을 혹하는 것에 있어 대중심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문제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장함에 있어 메스미디어도 상당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초기 미네르바의 경우 입소문 또는 인터넷상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어느순간 뉴스에 등장한 경우이고, 허경영의 경우 동서울터미널 많이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로또신문을 통해 이름을 알리다 순식간에 기행으로 뉴스에 등장한 인물이지요. 잠깐 센 이야기지만 몇년전 동서울터미널에서 로또신문을 봤을 때 대선에까지 나올줄은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구지 왜 이런 짓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암튼 두분 다 자기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었고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허경영의 경우 구속된지 오래고 미네르바도 이제 조사가 끝나가는데, 우리의 자세나 태도에 있어 반성은 부족한것 같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폭풍으로 볼것 만이 아닌, 이런 사람들이 나와도 그것의 참인지 거짓인지, 확실한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 두분이 정치나 경제에 있어 국민 다수의 동의 또는 변화의 필요성을 환기시킴에 있어 순작용을 했던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이 조소로써 허경영에게 투표하였고 그 결과 불사조, 탈당 그랜드슬래머 이인제씨도 꺾을 뻔했죠.
 예전에 허경영에게 투표했던 분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은 "지금도 지지하십니까?" 또는 "지금도 그의 이론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입니다. 전 허경영을 욕할 의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정치계에 한방 먹였다는 점에서 그의 "팬"입니다. 지금 그의 싸이를 가보니 투데에 1100을 넘었던데, 방명록을 보면 "일촌평좀써주세요 부탁해염" 라는 식의 글만 볼 수 있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결국 대선후에는 이슈만을 요구하는 메스미디어에 농락당했지만요. (물론 자신이 오히려 메스미디어를 이용했다라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 아직 허경영 신드롬은 끝나지 않은 듯. 다음에 다시 나왔을땐 우리는 어떤 태도로 그를 봐야 할까요? 
                   단순한 사기꾼? 아님 허느님? ]          
 미네르바의 경우는 어떨까요? 미네르바는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끌었고 그 또한 경제를 논함에 있어 반 MB 쪽 여론의 중요한 역할을 맏았습니다. 지금은 구속상태이고요 아직 논란의 요소입니다만, 미네르바 지지자분들은 지금의 그가 가짜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분들이 다시 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시 그런 분들이 나타나면 또 다시 이분법된 의견으로 갈라질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갈리기 이전에 그 사람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도출하지 못한체 "말을 그럴사하게 하니까 믿을 만해" 또는 "내가 싫어하는 반대파 의견을 공격할 수 있는 말이니까 무조건 찬성!" 조의 생각은 반성해야할 사항아닐까요? 누군가 허경영의 사상과 미네르바의 말이 앞뒤가 안맞는다라는 말을 꺼냈다면 존중받고 한번 더 생각해보기는 커녕 무시또는 비난일색이었던 인터넷 세상 아니였습니까? 이런 마이너리포트적인 의견이 많이 나오고 타당한 반박과 의견 교환이 현명한 판단에 있어 좋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대표적 경우는 파블로프의 개 사건도 있었지만요. 암튼 앞으로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도 대중심리에 이끌리거나 메스미디어의 말만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의견을 확립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엔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dir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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