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의 고전중인 하나인 주홍글씨는 스토리에 치중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 개개인의 심리묘사에 치중한 상당히 감성적인 소설이다. 누가 고전은 고전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했던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에도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기에 ‘고전’ 이라는 틀을 벗어나 필자에게 준 감흥은 대단했다. 또한 스토리의 진전보다는 작가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무거운 주제를 풀어쓰는 작가의 힘은 필자에게 다소 지루해보일지모르는 소설 전개에 큰 힘이 되었다. 처음 주홍글씨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시절에 보았던 TV영화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몰랐지만 소설로 접하고 나서는 주홍글씨가 뜻하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 전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놀라웠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주홍글씨가 단지 낙인을 찍는다라는 의미로써 페시미즘(pessimism:염세주의) 소설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소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죄를 지음에 있어 행복에 입각할 수 있다는 금욕을 거부하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이것은 등장인물의 속성과 작가의 시점에서 들어난다.

우선 시점부터 보자. 작가의 시점은 내면세계를 보임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서술해 주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독자에게 양날의 검이 되었다. 서술자가 모든 것을 다 밝혀 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상하거나 유추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독자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전개라기보다는 작가의 주장을 주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소설을 본다기 보다는 소설을 빙자한 논설문을 보는 듯했다. 사실 필요이상의 미사어구의 사용으로 소설에 집중하기 어려웠을뿐더러 느린 템포의 전개와 주변 상황을 이용한 상징수법으로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던 소설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심리설명에 치중함으로써 작가는 등장인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서술 방식이 이 소설의 최대 무기이고, 인간내면에 있어 작가의 놀라운 서술기법은 글을 읽어 나감에 따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이런 시점을 통해 등장인물 개개인은 무엇을 대변해 주는가?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을 보자. 헤스터는 간통을 하고 그 죄로써 주홍글씨를 새기고 다녀야하는 인물이다. 평생 달고 다녀야하고 간통한 남자를 숨겨야하는 가련한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주제가 숨겨 있다. 헤스터는 A(adultery)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다. 즉, 죄를 지었다는 증표이다. 그리고 헤스터의 A는 도덕성을 대변하기 위한 장치이다. 청교도 사회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자들과 반대되는 헤스터는 이상의 완전함을 깨뜨리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세상이 존재할 수 없고 죄를 짓고 참회할 수 있음에도 진정한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헤스터 프린을 통해 19세기에 있어 파격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간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 오히려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하다고 할까? 완벽한 이상사회를 거부하는 작가의 대변자로써 그녀는 어쩌면 반사회적인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위 사람들이 주홍글씨를 가진 그녀를 멸시하면서도 그녀의 이웃을 향한 착한 성품과 마음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이상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다. 겉으로는 죄지은 그녀를 멸시함에 이상적인 사회가 정상적인 기능을 갗추고 나아간다고 볼 수 있으나 정작 헤스터의 성품을 인정하는 부분은 청교도 사회에 있어 위법행위이고, 완전한 엄격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외침인 것이다.


그녀의 간통 상대이자 목사인 짐즈데일은 사회의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목사로써의 위치에 거짓을 일삼을 수 밖에 없는 그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소설에 따르면 그 당시의 목사의 지위는 완고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신앙심과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위법을 저지른 다는 것은 이상사회에 대하작가의 회의를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세계 건설에 앞장서야 할 지도층이 간통이라는 -그것도 목사라는 직책에서 - 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비판 수단이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 완벽함을 연기하는 것, 그리고 완벽함을 원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존경받는 리더가 완벽하지 못함은 분명 아이러니한 상황이자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라는 것으로 한번 더 신랄하게 비난한다. 짐즈데일이 설교를 하는 도중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듣는 청중들은 짐즈데일의 죄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존경받는 목사 자신도 죄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들은 얼마다 더 죄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죄를 인정함에 있어 겸손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어 더욱 더 존경받게 되는 상황이 된다. 짐즈데일을 통한 사회 위선의 비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짐즈데일이 죄를 말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고 혼자서 고뇌하는 것이 진정한 이상사회를 유지하는 행위일까? 이것에 작가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죄를 말하고 죄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적인 행위이고, 비록 죄를 인정하는 것이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비인간성에서의 회복을 가져다주고,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딤즈데일이 새벽 중에 세상의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광장의 형장에 올라가 용기를 내어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자신의 죄를 참회할려는 모습에서 더욱 부각된다. 나아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장면, 즉 죽음의 앞에서 자신을 죄를 말하고 헤스터와의 딸이자 자기의 딸이기도 한 ‘펄’ 의 키스를 받는 장면에서 인간성의 회복은 죄의 숨김이 아니라 죄를 들어 내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 2편에서 계속. http://dirlove.tistory.com/entry/주홍글씨를-읽고서-쓰는-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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