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헤스터의 남편이자 의사이며, 작가가 비난하고자 하는 것을 대변해주는 칠링워드를 보자.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남편이고 유능한 의사라는 설정인데, 헤스터가 목사인 딤즈데일과 불륜을 하게 되고 그 증거이자 악의 씨라고 생각되는 펄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악의에 찬 복수를 하게 된다. 복수인 즉, 칠링워드가 딤즈데일 목사의 건강을 체크해주는 일종의 주치의였는데,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이었음을 숨기고 딤즈데일의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목사로써, 존경받는 위치로써, 인간으로써 치욕적인 죄를 짊어지고 있는 딤즈데일을 오래 살게 함으로써(그것도 원수인 칠링워드 자신의 의술로써) 살아가는 동안 그 죄를 평생 안고 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7년간 계속 됐으며 실제로 딤즈데일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자책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비극성을 극대화 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타락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유능한 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청교도적인 이상주의 세상을 자의든 타의든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 모든 것이 결국 그 이상주의 세상을 뒤흔드는 카오스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선 딤즈데일에게 자신이 헤스터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딤즈데일에게 죄 감각을 고취시키는 의료행위와 친한 교우 관계 행동자체가 칠링위드가 저지르는 죄인 것이다. 목사로서 딤즈데일이 자신이 헤스터와 불륜관계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의 입막음의 행위이며, 죄에 복수함에 또다른 죄가 나타난다는 사실, 즉 완전한 이상적인 사회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 반영되는 것이다.
위의 주제를 더 잘 보여주는 소설에서의 배경이나 소품에 대한 생각을 말해보겠다. 제목이기도 한 ‘주홍글씨’ 라는 것에 관해 먼저 말해보겠다. 주홍글씨란 죄지은 자에게 일종의 낙인 역할을 하는 죄의 표식이다. 그것도 평생 안고가야하고 청교도적 법도의 엄격함과 절대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표식 자체의 성질은 소설전체를 통틀어 두번 변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숲에서 헤스터가 딤스데일을 만나서 칠링위드의 정체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헤스터가 딤스데일과 도피를 도모하면서 주홍글씨를 시냇물에 떼내어 버리는 장면이있다. 이때의 주홍글씨의 상징성은 죄에 있어 두사람의 해방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는 에필로그에서 변하는데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원래 의미로의 회기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딤스데일과 칠링위드 사후 그녀의 딸 펄과 유럽으로 떠나는 헤스터가 나이가 들어 다시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와서 떼었던 주홍글씨를 달고 소설의 무대인 뉴일글랜드에서 평생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마지막에서 죄를 떠나 인간은 살 수 없다 라는 작가의 의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펄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말하자면, 결과적으론 소설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키로써 작용한다. 딤스데일에게 하는 펄의 키스는 그 목사의 죄를 승화시키는 한편, 인간성의 정화를 보여준다, 비록 펄 자신은 불륜의 자식이라는 면이 있지만 결국은 그런 불륜의 자식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나중에 성공한다는 후일담으로 보아 이 소설에 있어 유일하게 행복하게 된다. 앞서 필자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전개 수수법이 상징이라고 말했는데 필자가 펄을 통해 가장 신선했던 점이 있다면 아이의 눈을 통한 독자 상상의 여력을 작가가 남겼다는 점이 었다. 펄 자신은 이 소설에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고 나이가 어려서 작가 생각의 개입이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적었다. 그러니까 헤스터 등의 모든 행동이나 생각은 상징화된 언어도 표현되는데 펄은 아이의 순진함에 입각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펄의 눈을 통한 등장인물의 제구성은 소설을 읽어가는 하나의 재미였다.
이 소설에서 또 중요한 장치는 바로 법을 집행하는 ‘형장’ 이다. 이 소설의 시작부분의 배경이기도한 형장은 소설 전체에 있어 처음, 중간, 끝에 배치되어 있는데 처음 헤스터의 불륜에 관한 재판 장면, 두 번째는 딤즈데일이 용기내서 고백하려고 시도하는 시점, 그리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는 딤즈데일이 죽는 장면이다. 이런 요소에 있는 형장 각각의 의미도 틀리다. 재판에 있어 형장은 헤스터의 죄만 존재하고 뉴잉글랜드 법의 신성함을 뜻한다. 중간의 고백장면은 딤즈데일의 고뇌를 뜻하는 장소로서 대변 된다. 딤즈데일이 죽는 장면에서 형장은 처음 헤스터 재판이 열릴 때 딤스데일이 솔직히 고백하지 못한 죄의 해소를 말하고 처음의 뉴잉글랜드의 이상적인 청교도 법도를 대표적인 청교도 집행 기관인 형장에서 거부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위에 필자가 서술한 것을 통틀어 간단히 주제를 생각해 보자. 자신의 죄를 말하고 싶어도 자신의 안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위치와 신적으로 자신을 존경하는 신자들을 실망하지 않게 하기위해, 나아가 목사 신분으로 자신이 평생 따르던 신념인 청교도적 금욕적인 삶의 타락을 자신이 인정해야 할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딤즈데일의 마음을 통해. 이런 고통의 소통과정을 풀어줄 단 한가지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죄를 인정하라’ 라는 것. 그리고 그 죄를 인정하고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이고 다시 말해 죄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적인 낙원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필자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고전은 고전에서 머무를 수 없다 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진 1800년대에 있어 이상적인 관념을 철폐하고 자하는 무거운 주제는 분명 요즘 시대와는 동떨어진 주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과거의 문학은 현재의 마음의 양식을 충족해 줄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 시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며, 가장 중요한 ‘현재에 다시 그 현상을 조명해볼 수 있다’ 라는 점에서 고전이 좋다. 예를 들어 이상주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분명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주의 반대론자가 본다면 공감하며 읽지 않을까? 물론 이상주의가 틀리다 맞다의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고의 모임은 현재시대 상황을 한번쯤 반성해 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너무 이상적인 사회이지 않는가? 또는 너무 법이라는 틀에 박혀 사는 것 아닐까? 이런 반성의 반복은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각각 죄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딤즈테일과 헤스터, 그리고 칠링위드 같은 지금 사람의 삶을 재조명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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